
기차 창문이 뿌옇다면 바다가 보여도 소용없다고 생각하셨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미국 암트랙 해안선 구간을 탔을 때 기대를 잔뜩 품고 창가에 앉았다가, 오래된 유리창 너머로 뿌연 바다를 보며 실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130년 만에 개통된 동해선 구간을 영상으로 접하고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KTX 이음, 실제로 타보면 다를까
일반적으로 고속열차라고 하면 좌석이 좁고 창문도 작다는 인상이 강한데, 제 경험상 이건 꽤 오래된 편견입니다. KTX 이음은 기존 KTX와 달리 틸팅(tilting) 방식의 차체 기울기 시스템을 적용한 열차입니다. 여기서 틸팅 방식이란, 곡선 구간에서 차체가 안쪽으로 자동으로 기울어져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승차감을 높이는 기술을 말합니다. 덕분에 동해안처럼 선형이 복잡한 구간에서도 속도를 크게 줄이지 않고 달릴 수 있습니다.
청량리역을 출발해 동쪽으로 향하는 구간에서는 이른 아침 북한강 물안개를 창밖으로 볼 수 있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동해 바다가 정면으로 펼쳐집니다. 이 구간에서는 진행 방향 기준 왼쪽 창가 좌석이 명당입니다. 바다와 가장 가까이 달리는 고속열차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차창 밖 풍경이 압도적입니다.
일본에서 유후인노모리를 탔을 때는 차체 흔들림이 꽤 심해서 창밖 구경보다 멀미 걱정을 먼저 했습니다. 그 경험에 비하면 KTX 이음의 승차감은 확실히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나라 기차가 쾌적하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이번 동해선 구간을 보고 그 확신이 더 강해졌습니다.
동해역에서 환승하는 누리호 열차는 과거 무궁화호를 대체한 차세대 일반열차입니다. 좌석 간격이 KTX보다 넉넉하고, 220V 콘센트와 개인 테이블이 있어서 장거리 여행에도 부담이 없습니다. 환승 대기 시간이 약 10분으로 짧아서 역사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용의 꿈길, 기대보다 훨씬 멋진 트레킹 코스
죽변역은 승무원이 없는 무인역(無人驛)입니다. 여기서 무인역이란, 역무원과 매표 시스템이 없어 승하차만 가능하고 모든 서비스가 자동화된 소규모 역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이게 단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열차 도착 시간에 맞춰 편성된 무료 셔틀버스가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어서 이동에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게다가 울진군 전역의 시내버스가 무료로 전환되어 있어, 교통비 부담 없이 이동할 수 있습니다.
죽변 일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용의 꿈길 트레킹 코스입니다. 이 코스는 해파랑길 26코스와 연결되는데, 해파랑길이란 부산 오륙도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 770km를 잇는 장거리 도보길입니다. 이 길 안에서 용의 꿈길은 대나무 숲, 등대 공원, 해안 데크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짧지만 밀도 높은 코스를 구성합니다.
죽변 등대 공원에 가면 지금도 실제로 운영 중인 등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자전거로 동해안 종주를 할 때 이 언덕 구간을 지나갔는데, 그때는 그냥 힘들게 페달 밟으며 지나친 곳이었습니다. 걸어서 천천히 올라보니 그때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이 이렇게 많았다는 게 조금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코스 중간에는 울릉도·독도 최단 거리 기점 바위도 있습니다. 울릉도까지 130km, 독도까지 216km 떨어진 내륙 최단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지만, 그 바위 앞에 서면 독도가 실제로 우리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감각이 생각보다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죽변 스카이 레일(Sky Rail)은 현재 운행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스카이 레일이란 지상에서 높이 띄운 레일 위를 캐빈이 이동하는 관광형 모노레일 방식의 교통수단으로, 한때 이 코스의 인기를 이끈 핵심 시설이었습니다. 안전 점검 문제와 계약 분쟁으로 운행이 무기한 중단된 상태라는 점은 다소 아쉽습니다.
죽변역 당일치기 여행 핵심 동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죽변역 하차 → 무료 셔틀버스로 5분 → 죽변항 일대 도착
-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 → 하트 해변 → 용의 꿈길 트레킹 시작
- 기점 바위(울릉도·독도 최단 거리) → 죽변 등대 공원 → 해안 데크길
- 죽변항 수협 수산물 센터 → 죽변 해심원 온천 → 봉평 해수욕장 → 죽변역 귀환
죽변항, 대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죽변항은 경북 울진군 죽변면에 위치한 제1종 어항(漁港)입니다. 여기서 제1종 어항이란 어선의 이용 범위가 전국적이고 어업의 근거지가 되는 국가 어항을 의미합니다. 이름보다는 대게 산지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항구 자체의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큽니다. 4층 옥상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그 스케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보니, 대게잡이는 시기가 지나면 항구가 꽤 한산해집니다. 방문 시점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가시면 좋습니다. 수협 수산물 센터 3층 카페는 전망이 압도적인데, 이런 뷰를 가진 카페는 국내에서도 흔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항구 근처를 걷다 보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울진 후정리 향나무를 만납니다. 수령 500년 이상, 높이 14m에 달하는 이 나무는 전설에 따르면 울릉도에서 파도에 밀려온 씨앗이 자란 것이라고 합니다. 옆에 있는 사당과 비교하면 크기가 얼마나 압도적인지 바로 감이 옵니다. 동해안 여행을 다니면서 이런 오래된 나무를 만나는 건 늘 예상치 못한 수확입니다.
울진은 대규모 산불 피해 이후 관광객 유입이 크게 줄었다는 점도 현실입니다. 울진군청에 따르면 2022년 산불 이후 지역 관광 수요 회복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입니다(출처: 울진군청). 바다열차 개통, 무료 버스 전환 같은 교통 인프라 개선은 그 흐름의 일부로 보입니다. 한국 관광이 서울에 집중된다는 말이 많은데, 지방에서 이런 방식으로 교통 접근성을 높이는 시도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 따르면 동해선 완전 개통 이후 경북 동해안 방면 열차 이용객이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출처: 한국철도공사).
기차 여행의 매력은 창밖을 그냥 바라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20대 때 KTX를 타고 내려가면서 역 근처 빵집에서 산 빵 하나, 기차 안 맥주 한 캔이면 그게 다였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동해선 바다열차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어줍니다. 창밖에 실제로 바다가 있다는 것. 자차나 버스로도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 이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여행을 하고 싶다면 이번 노선은 한 번쯤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합니다.